히비키, 하고 호명하는 목소리가 낯설지 않아 뒤를 돌아보니 눈에 익은 듯한 금발의 왕자님이 서서 자신을 푸른 청안 가득 담고 있었다. 다정하고, 책을 들고 다니던 상냥하고 잘생긴 왕자님은 이제 와선 금빛 머리카락과 여름날의 하늘 같은 청안을 제외하면 모르는 사람 같았다. 이상하지, 그렇게나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신뢰했기에 손을 내밀어 미래를 약속했는데.
그러나 내 왕자님도, 아니지, 이치로 나기도 이제는 나에 대해 잘 모를 것이다. 나를 신뢰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건 외견적으로 남장을 하고 있기 때문도, 길던 머리카락이 짧아져서도, 내가 최고의 프린스가 되었기 때문도 아니고, 연 단위의 시간이 지나서도 아니다. 나를 당연한 듯 에스코트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근처의 카페에서 의자를 빼내, 내가 당연히 앉아줄 것으로 생각하는 듯 잘생긴 얼굴로 미소하고 있는 얼굴이 더 이상 아이처럼 천진하지 않아서도 아니다. 그 손에 더 이상 책이 들리지 않아서가 아니다. 나기가 내 곁을 떠난 사이의 일을 나기는 모른다. 내 곁을 떠난 나기를 나는 모른다.
그럼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서로를 모르는, 남남이 된 사이인 걸까. 주저함이 드러나지 않았기를 바라며 최대한 태연하게 의자에 앉자 나기는 시간의 공백 따위 중요하지 않다는 양 히비키는 아직도 가토 쇼콜라를 좋아하지, 하고 말을 걸며 자연스럽게 메뉴판에서 어울릴만한 차가 있는 부분을 펼쳐 내 앞으로 밀어주었다. 나에 대한 건 여전히 잘 안다는 양 웃고 있는 얼굴이 그리웠다. 저렇게까지 의기양양하진 않았는데, 싶으면서도 이 정도로 친하다는 사실이 기꺼웠다. 나를 기억해주었다는 점이 좋았지만, 그것이 지난 시간에 의한 잔재라는 사실이 싫었다. 우리가 헤어지기 전에도 너는 끝끝내 그 벽 너머를 보여주지 않았지. 그래서 내가 왕자님을 찾다 지쳐 왕자님이 된 순간에서야 네가 찾아온걸까. 유로파라에서 인기 있는 무비 스타가 되어서, 다카라즈카의 어린 신성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위치에서도 네게는 내 이야기가 닿지 않은 걸까. 진한 초콜릿 향이 카페의 주방에서 흘러나올 때, 아직 좋아할 줄 알았다는 양 웃고 있는 네게 왜 오지 않았냐고 새삼스럽게 투정을 부리고 싶어졌다.
부질없는 일이다. 다과보다도 먼저 도착한 차를 왕자님의 모습으로 들어 올림에도 놀라움 하나 없이 싱글벙글 웃기만 하는 왕자님, 아니, 나기를 의식하며 되새겼다. 전부 부질없는 일이다. 자신은 거짓된 세상을 등지기로 마음먹었으니까. 이미 프린세스 후보생으로 점찍은 미도리카제 후와리도 있지 않나? 보컬돌이 되어 프리파라를 개혁하고, 영원히 프리파라에서, 그 진실한 세상에서 살아가기로 마음먹었을 때 그 선택에 이치로 나기가 차지한 비중은 없었다.
“히비키, 나랑 다카라즈카에 가자.”
그런 비중 따위 없다. 네가 한참을 늦지 않았는가. 단정 짓는 어미에 고개를 들어 새파란 여름 하늘에 물들어버린 내 모습을 나기의 두 눈에서 찾으면서도 속으로는 그렇게 되뇌었다. 이렇게 가깝게 관찰하는 이유는 네가 밉기 때문이다. 만나자마자 나를 잘 안다는 양 여유롭게 눈을 휘어 웃는 네가, 한 점 걱정 없이 내가 손을 붙잡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이미 내 손을 붙들고 걸어가는 네가, 밉다. 진한 초콜릿 향이 딱 자신이 좋아하는 농도로 풍겨오는 가토 쇼콜라를 당연하게 내 앞에 세팅하는 저 흰 손끝이 밉다.
“싫어, 나기. 네가 프리파라로 와.”
투정 부리는 어린아이를 달래듯 축 늘어지는 저 고운 금색 눈썹이, 상냥하고 나긋하게 대화를 청하던 목소리가 새삼스럽게 선명하게 기억나, 지금의 목소리와 비교 가능해지게 되는 상황이 싫다. 내가 당연하게 다과를 입으로 가져갈 거라고 지레짐작하고, 당연하게 손수건을 건내는 손이 기억에 남는 게 싫다. 그 손에서 손수건을 가져가야 하는 상황이 싫다. 네가 오지 않았음이 밉다. 이제야 나타나 내 선택을 당연하게 등한시하는 모습이 증오스럽다. 내가 다카라즈카로 향한다 한들 네가 나를 또 두고 가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하는가? 이 거짓된 세상 속에서 또 나를 등지고, 저 높은 무대로 나아가, 다시는 돌아보지 않게 될 것임을 내가 안다. 네 곁을 비워둔 것이 내 자리라는 말도, 나를 사랑한다는 말도 믿을 수 없다. 몇 년 전의 어리석은 추억을 간직한다는 허황한 꿈도 신뢰할 수 없다.
그게 천재가 그린 벽화에 불과하다면 나는 다시 이 거짓된 세계에 주저앉아 벽화에 속아 넘어간 자신을 탓해야 하고, 내가 나를 탓할 때 너는 유구히 내 옆에 없었으므로 그때는 다시 혼자일 것이다. 프린세스 후보생에게도 속아넘어간 모습을 들킨다면 프리파라 무대에도 설 수 없게 된다. 최고의 프린스는 속아 넘어가지 않으니까. 천재는 벽에 가로막힌 길을 선택하지 않으니까. 막다른 길 앞에서 무너지는 이는 범재이고, 막다른 길이 실은 막다르지 않았음을 알아차리는 이만이 천재의 자격이 있다.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고 홀로 나아가는 방법을 아는 이만이 세상을 개혁할 자격이 있다.
그러니까 나는 다카라즈카로 가지 않는다. 나는 나기의 옆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동화 속에서도 왕자님 옆에는 왕자님이 필요하지 않았고, 프린스에게 필요한 건 프린세스이지 무대 위의 다른 왕자님이 아니기에. 잊지 않도록 되뇌어야 한다. 저 여름 하늘에 빨려 들어가면 그제야 그게 하늘이 아니라 바다임을 알아채게 될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