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치로 나기 × 시쿄인 히비키
-아적-
자아 없는 바다 괴물, 이치로 나기. 그리고 무대 위 거짓말쟁이, 시쿄인 히비키.
이 둘은 기본적으로 서로에 대한 소유욕과 애정은 가득하나, 그 욕망을 서로 자신의 쪽으로
끝없이 당기기에 각자의 욕망이 만나지는 못하는 관계입니다. 양쪽에서 감정의 크기로 힘을
겨루는, 마치 줄다리기와 유사한 구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이 있는 곳
으로 오라며 끝없이 설득하고 집착하지만 양쪽에서 팽팽히 대치하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상
대가 자신의 쪽으로 넘어오길 바라고 기다립니다.
이치로 나기, 그는 배역에 몰입하는 것을 넘어 자신을 버리고 그 배역 자체가 되는, 어떻게
보면 상당히 극단적인 방식을 택했습니다. 그의 그런 행동은 자기 자신에 대한 애정이나 본능
보다, 연극과 무대라는 또 다른 인생을 훨씬 크게 여기며 지키려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렇게 자아가 없다고까지 불리게 된 그가, 타인의 존재 자체에 강하게 집착하는 것은, 어찌 보
면 그 집착의 대상에 본인이 간직하던 마지막 자아를 투영하여 지키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
다.
어린 시절, 나기는 히비키와의 관계와 그 약속을 정신적 지주로 삼은 채, 그의 곁을 떠났습니
다. 그렇게 홀로 극단으로 떠나 자아를 버리고 매번 새로운 배역을 본인의 인생으로 삼아가며
살아가던 나기가 내면 한 구석에 남겨놓은 마지막 자아의 조각은, 히비키를 향한 애정과 약속
을 담은 한 조각이었을 것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마지막 한 조각이 그 안에서 점차 존재
감을 키워가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이미 한껏 커질 대로 커진 히비키를 향한 기억과 애정은 그와 재회하고, 심지어는 그
가 트라우마로 인해 자신을 피하는 순간 거대한 집착으로 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쿄인 히비키, 그 또한 자신의 일부를 이치로 나기를 통해 봅니다. 그러나 나기와 히비키, 이
둘은 미묘하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나기는 그가 품던 기억과 애정이라는 자아 자체를
히비키에게 쏟아부으며, 히비키는 과거의 아픔으로 덮인 행복의 일부를 나기의 존재를 통해
매 순간 쓰리게 자각한다는 것입니다.
히비키가 과거에 주위에 대한 깊은 불신과 증오를 느낄 동안, 아마 그는 끊임없이 이치로 나
기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다정하고 상냥하게 자신을 감싸주던 친구이자, 유일한 이해자. 그런
나기를 계속하여 회상하고 불러볼수록 그의 빈자리는 점점 더 크게만 느껴지고, 끝내 자기 자
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체제로서 히비키는 그마저 원망을 담아 그리게 되었을 것으로 보입니
다.
그렇게 내면의 상처를 깊이 숨기고 화려한 거짓말로 본인을 치장하며 무대에 오른 히비키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 속에 숨긴 나약한 자신과 그 과거를 다시 들춰보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
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 약점 자체를 완벽하게 지우고 부정할 수 있는 인외의 존재를 목표로
삼은 채, 자신의 현실을 회피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자신의 가장 아프고도 순수하게 찬란했던 과거의 조각이자, 과거 자체인 이치로
나기를 재회하고 내면에서의 충돌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히비키는 아픈 과거를 숨기고 누구보
다 화려하게 살아가던 만큼, 그 내면의 날카로운 진실의 외침에는 취약했습니다. 그랬기에 그
가 그 당시 추구하던 보컬돌이라는 인외의 존재와 이치로 나기라는 찬란한 조각, 양쪽 모두
놓고 싶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양쪽에서, 서로를 가져오겠다는 일념 하에 상대를 끝없이 당긴다는 것은 결국, 그 사
이의 관계가 팽팽한 만큼 다른 방향의 자극에는 취약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히비키는 다른 방
향에서 온 이들과의 우정으로 인해 다시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한계까지 다다른 나기와 히
비키, 그들의 작용으로 이루어진 관계에서는 그것이 한순간에 끊어지며 생기는 반작용만이 남
고,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게 됩니다.
겉으로는 무던히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지만, 한계까지 당기던 관계가 끊어지며 그 아픔을 한
순간에 받아버린 것은 아마 이치로 나기, 그리고 시쿄인 히비키. 그 둘의 숨길 수는 있으나
아물지는 않는 영원한 상흔으로 남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